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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옥수수, 감자와 고추 농사를 지으며 평생 그곳에서 살아왔을 강원도 두메산골 사람들의 삶의 풍경이 기록된 이 다큐멘터리 흑백사진은 급박한 상실과 소멸로 줄달음질치는 시간의 자취를 안타깝게 기억하고자 하는 시선에 의해 저당잡혀 있다. 작가는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장면이 얼마 안 있으면 이 땅에서 사라지리라는 불안한 확신을 잠시나마 유예시켜 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의 배려를 보여준다. 애틋하게 스러지는 과거를 보존하고자 하는 의지는 지난 시간의 흔적을 머금고 있는 것들을 순간적으로 동결시키는 데서 멈춘다. 지상에 영원이란 없을 것이다. 사람의 육신이나 그가 거쳐 간, 살아오면서 엉킨 모든 흔적을 머금은 풍경은 일정한 시간이 경과하면 마모되어 즙이 되고 가루가 되어 날릴 것이다. 그래서 더욱 슬프고 비애스러운 감정이 사물의 피부에 잠자리처럼 가서 앉는 것일까?
조문호가 보기에는 이곳 정선 산골에서 농사지으며 사는 이들의 삶의 모습이야말로 한국인의 전형적인 습속과 전통적인 풍습, 정경을 거의 기적처럼 간직하고 있는 마지막 잔영이다. 그는 그 장면을 기록하고 기억하고 각인하는 일을 소명처럼 간직한다. 보는 이들에게 뼈저린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새삼 우리네 선조들의 삶의 모습을 환영처럼 떠올리게 한다. 급속한 근대화 속에서 빠르게 망각되고 훼손된 우리네 삶과 문화에 대한 반성과 비판의 시선이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여기는 생활현장과 사람들의 몸에 근접한 것이다.

작가는 정선에서 살면서 그곳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약 6년간 촬영했다. 그 시간은 그가 그곳에서 그들과 온전히 만나고 보낸 시간이다. 그가 찍어 놓은 두메산골의 풍경과 산사람들, 그들의 살림살이와 연장은 모두 남한 땅에서 마지막 숨을 쉬고 있는 골동화한 흔적들이다. 이 땅에서 수천 년 삶을 이어오던 조상들의 살림살이 방식과 그들의 도구가 고스란히 스며 있는 이 장면은 보는 이의 시선을 갑자기 아득한 과거로 회귀하게 한다. 사실 상당수 농촌은 전통적인 살림이 보존된 곳이긴 하지만 강원도 정선의 오지인 이곳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한 편이다. 사진 속 현장은 강원도 정선의 어느 산골이다. 그러나 정선이란 곳의 지형적 특성과 장소성을 표식하는 어떠한 단서도 없다. 다만 인간과 자연, 삶의 공간, 노동의 현장만이 함께할 뿐이다. 그래서 이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으며, 그들의 살림살이의 정도가 어떠한지를 대충 짐작할 수 있는 시각적 정보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과 그 사람의 삶을 보여주는 배경이 적당한 구성 아래 자리한다.
이들은 한결같이 땅에 앉아 있거나 가만 서 있다. 아마도 수천 년, 수백 년 동안 동일한 장소에서 비슷한 포즈를 취하며 살았을 그들의 조상과 별반 다름이 없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삶과 함께했을 연장들이 오랜 노동으로 묵은 손에 쥐어져 있다. 낫과 호미, 지게와 도리께, 망태기, 도끼와 물레, 화로와 가마솥, 지팡이와 쟁기가 오래 머물렀을 그 손들은 그 연장과 같이 늙어 허물이 없다. 오랜 농기구들은 늙은 노인의 피부와 구분이 없는 것이다. 연장의 나이와 사람의 연륜이 함께 그윽하다.
연장은 그렇게 아득한 시간 속에서 정지되어 여전히 인간의 육체와 결부되어 존재한다. 바깥 세상에서 컴퓨터와 첨단의 기계들이 난장을 벌여도 땅에서 먹을 것을 취하는 일에는 이 연장을 넘어설 길이 없다. 그래서 이 농기구와 식량과 관계된 도구에는 가장 본능적이고 소박한 욕망을 가장 순박하게 담아내는 아련함과 인간적인 비애가 넘쳐난다. 이들은 조상 대대로 그 연장에 순응해서 살아왔을 것이다. 자기 육체의 연장延長으로서의 연장과 도구는 그대로 그네들의 얼굴이고 육신이고 삶이자 목숨에 다름 아니다.
밥벌이의 수단인 도구, 자기 육체의 연장으로서의 도구, 먹고 살기 위해 필수적인 도구, 자연계에서 취할 수 있는 재료를 가장 기능적이고 소박하게 마무리한 이 도구에는 그대로 인류 역사의 시간과 숨결이 응결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모든 연장들은 장엄하며 슬프다. 고된 노동이 배어 있고 땀과 근육과 지문이 고스란히 달라붙어 있으며, 어떤 간절함과 고통이 그 연장의 피부에 스며 있기에 숙연함을 호출한다.
신석기시대 이래로 원시적인 농경이 시작되면서부터 이 땅의 농사는 농기구, 연장과 함께 진행되어 왔다. 아마도 이곳 정선의 오지는 그러한 한국의 전통적인 농기구를 거의 유일하게 보존하고 있는 장소일 것이다. 일종의 농기구박물관인 셈이다. 농기구는 단순한 연장으로서의 용도에서만이 아닌 민중의 생활사를 간직하고 있는 물질적 근거이기도 하다. 기층문화와 민속문화의 영역을 연구하고 밝히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농기구와 연장들이다. 민중들은 스스로의 역사를 간직하거나 기록해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네들의 삶과 노동, 희비는 그들의 연장에 말없이 잠겨 있다. 문자로 기록되지 못하고 오로지 몸으로 연장의 육신에 새겨 넣은 움푹 패인 자국과 긁혀진 생채기들과 닳고 문드러진 자취들이 다름 아닌 민중의 역사이고 생이고 그 생의 무늬이자 광휘일 것이다.

사진 속에는 강원도 원주민들의 삶의 풍경이 일종의 도감처럼 펼쳐져 있다. 농촌을 고향으로 둔 모든 이들은 이 사진 앞에서 다들 복고와 향수를 부채질하는 손길에 걸음을 멈추고, 기억을 되돌려 들어간 지난 시간 안에서 잠시 아늑할 것이다. 아마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이런 정경은 오직 조문호가 남긴 사진 안에서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사진은 이후 민속박물관이나 자연사박물관의 어느 한켠에 소장되어 보여질 것이다. 급속한 근대화의 물결 아래 일상이라는 영역에서 가시성이 사라지자 수집이라든가 사진 촬영 등 다른 종류의 가시성으로의 전이가 일어나는 것이 한국 시각적 표상물의 운명이라는 지적처럼 산골사람들 역시 사진으로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성은 단지 외형적인 정경과 도구의 피부에만 사로잡히지 않는다. 정작 조문호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은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살면서도 따뜻하고 착한 심성을 버리지 않고 열심히 대지에 의탁해 살아온 사람들의 마음과 강인한 정신력일 것이다.

사진 속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평생 살았을 장소에 앉아 있거나 우연히 산속에서 만난 사진기를 든 사람 앞에서 의아해 하며 잠시 멈춰 서 있다. 초라한 의복에 대부분 무표정하고 무심한 자락을 온몸에 드리우고 있다. 전형적인 시골사람들의 초상이다. 이종구의 농부 그림에서 만난 이들과 닮아 있다. 작가는 감정의 과잉 표현을 자제하고 즉물적으로, 객관적인 시각을 가능한 유지한 채 인물에 근접했다. 그 인물은 모든 것을 말해 주는 듯하지만 사실 우리가 아는 것은 매우 피상적인 수준일 것이다.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많은 것을 감추고 있는 것이 사진이다. 정면은 워낙 많은 것들을 품고 있다. 우리가 이 정면에 씌어 있는 데이터를 제대로 읽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진지한 독해가 요구되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희노애락과 감정의 표현이 물기를 잃어 바짝 말라 버린 듯한, 그러나 모든 것들을 넉넉히 받아들일 표정이 얼굴에 충만하다. 얼굴은 가장 인간적인 것이다. 얼굴은 한 개인의 정체성의 표식이자 문화적, 사회적 징후이다. 얼굴은 세상의 끝이고 세상의 시작이다.
이들의 표정, 주름, 옷차림, 살림살이는 현재 우리들의 도시문화와는 매우 이질적이지만 이질적인 만큼 왠지 슬프고 두렵다. 평생 가난과 노동을 숙명처럼 지니고 살아온 이들의 척추는 풀처럼, 나무처럼 존재한다. 오늘날 도시인 누구도 이들의 육체와 마음을 이기고 자연에서 스스로 생존할 수 없을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편리와 충족만을 추구하며 이기적으로 살아온 도시인들은 산골사람들의 가난과 결핍을 감당할 수 없다. 첨단의 시대에 역설적으로 인간은 더욱 나약해졌고 위태로워졌다.
조문호의 사진 속에 사람들은 한결같이 호미를 들고 김을 매다가, 풀을 베다가, 군불을 때다가, 한봉 일을 하다가 혹은 정미소에서, 디딜방아 앞에서, 방안에서 밥상을 마주하다가, 길쌈을 하다가, 물레를 돌리다가, 돗자리를 짜다가, 장작을 패다가, 소여물을 끓이다가, 옥수수를 말리다가, 새끼를 꼬다가, 약초나 산삼을 캐러 다니다가, 들판에서 일하다, 계곡에서 빨래를 하다가, 물지게를 지고 가다가, 감자를 캐다가, 멧돌을 돌리다가 문득 정지된 상태로 관자(觀者)를 향해 시선을 둔 채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 산골에서 그들은 자신의 몸을 놀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스스로 마련한다. 이 자가발전의 삶은 경이롭다. 현대인들의 삶은 다른 이의 노동을 끊임없이 착취해야 가능하다. 반면 농부들은 마치 식물이 광합성을 하며 자립하듯 대지에서 가능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며 산다. 이 생태적이고 환경 친화적인 삶과 소박한 삶은 동시대 사람들의 과잉과 화려한 범람의 삶에 반성의 거울로 다가온다.

그들에게 이 세상의 변방, 오지인 척박한 산비탈과 거친 땅은 유일한 생의 거처다. 오랫동안 깊은 산과 강에 막혀서 시대와 현실과 유리되었기에 힘들게 살았지만, 그랬기에 아름다운 주변환경과 따뜻한 인심을 지킬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오늘날 그 인심과 주변 환경은 급속히 피폐해지고 사라져 가고 있다. 오지산골 역시 도시화와 산업화를 피해 가지 못하고 있음을 본 작가는 그에 따른 안쓰러움을 이렇게 한 장의 사진으로나마 봉인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 사진이 감상적이고 복고적인 향수를 자극하는 사진으로만 머문다고 말하기는 또한 쉽지 않다. 여전히 휴머니즘과 정서적인 분위기로 자욱하지만, 동시에 객관적이고 기록적인 시선을 유지하기 위해 작가는‘드라마’를 가능한 배제하고자 한다. 날씨의 변화나 음영의 대비가 두드러지게 자리하지 않기에 좀체 시간과 온도, 기후를 가늠하기 힘든 중성적인 상황이 나른하게 펼쳐져 있다. 원경의 풍경은 배제되고 곧장 사람과 그 주변으로 압축해서 프레이밍되고 있다. 특정한 동작을 취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만을 보는 이의 시선에 고정시켜 준다. 이 사람들은 현재 자신이 서 있고 앉아 있는 풍경 안에서 또 얼마의 삶을 살다가 그 어느 곳에서 죽어 묻힐 것이다. 그러면 다시 풀이 나고 꽃들이 피고 나무가 자라 엉킬 것이다. 아마 이들이 그곳에서 살 마지막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자식들과 친척들 모두가 외지로, 도시로 가 버린 지금 이들만이 홀로, 부부로 남아 삶을 연장하고 죽음을 기다린다. 할아버지, 할머니 단 두 분이 사시는 허름하고 누추한 방 벽에는 화려한 성장을 한 손주, 손녀가 액자 속에서 내려다본다. 고추를 드러낸 손자와 이국의 공주차림의 손녀는 사내아이와 여자아이의 성차를 극명하게 표상하는 이미지로 재현되어 있다. 못을 박아 옷들을 열매처럼 매단 벽 상단에 걸린 그 사진 아래 다 늙어 버린 이 노부부가 앉아서 우리를 바라본다. 먼 훗날 손자들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외롭고 궁핍한 이 방 안에 부적처럼 걸렸던 자신들의 사진의 의미를 헤아릴까?
홀로 사는 노인의 방은 그러한 사진조차 없이 적막하다. 축 처진 천장, 달력과 거울, 옷들이 걸린 벽과 곡물포대, 이불보따리, 종이상자가 쌓여 있고 비닐장판은 주름이 지고 울어댄다. 외부와 교신할 어떠한 장치도 없다. 이 단촐한 살림살이는 더 이상의 가난이 스며들 자리조차 없어 보인다.
유일하게 중년 부부의 사진 한 장도 눈에 들어온다. 40대 중반 정도 되었을까? 식사중인 모습이다. 작은 밥상에 밥과 김치, 고추, 장이 놓여 있다. 남자가 밥상을 받고 여자는 바닥에 놓인 양푼에 담긴 밥을 먹는다. 옆에 놓인 화로 위 주전자에서 물이 끓고 있다. 벽을 가로질러 빨래줄을 매달고 그 위에 이런저런 물건과 비닐봉지, 옷가지를 걸어 놓았다. 가구란 이들의 삶에서 너무 사치스럽다. 모든 것은 종이박스 안에 들어 있거나 벽에 걸린다. 벽 상단에는 역시 사진액자가 가득하다. 부모님의 사진, 결혼식 장면, 그리고는 학사모를 쓴 아들(?)의 사진이 가장 크고 화려한 액자로 마감되어 걸려 있다. 이 사진들이 이들 삶의 모든 것이고 유일한 것이며, 보상이자 위안이고 희망일 것이다.
부엌에 쪼그리고 앉은 노파는 한없이 가볍고 작은 육신으로 둥글게 말려 있다. 그녀는 일생을 초라하고 어둡고 눅눅한 그 부엌에서 부뚜막에 맞춰 척추를 누그러뜨리고 살았을 것이다. 그녀는 시집온 순간부터, 아니 여자로 태어난 순간부터 부엌데기가 되어 평생을 살아왔을 것이다. 노파의 굽은 허리는 그녀의 부엌일, 농사일과 비례한다. 조리와 난방을 이루고 조왕신을 모시는가 하면 절구질 따위를 하는 작업 공간이자 몸을 씻고 아랫사람들은 밥을 먹고 며느리는 시집살이의 고달픔을 눈물로 찍어내던 곳, 부지깽이로 무언가를 끄적이던 공간이 바로 부엌이며, 그 부엌이야말로 한국 여인들의 삶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부엌은 한국 여인들에게는 역사적 공간에 다름 아니다.

평생을 자연에 순응하며 세상과 등지고 살아왔을 이 이름없는 민중들의 삶과 역사는 무엇이며, 어떻게 말해져야 할까? 그들이 땅을 경작하고 식량을 채집하며 강하고 질긴 목숨을 꿋꿋하게 이어온 그 내력이 우리네 전통이고 역사였음을 이들의 얼굴과 몸에서 다시 확인해 보는 일은 새삼 한국인의 정체성을 사유해 보는 일에 다름 아닐 것이다. 조문호의 사진은 비로소 그들의 소멸과 망각 이후에 유일하게 남아 그들의 삶의 언어를 묘석처럼 제공해 줄 것이다.

박영택(미술평론가, 경기대 교수)






정선군 북면 고양리 1반 정순교 씨(78세). 2004. 9.

삼척시 도계읍 차구리 김지석 씨(83세). 2003. 7.

정선군 북면 봉정리 발메마을 조인순 씨(90세). 2003. 5.

정선군 정선읍 귤암리 최종대 씨(51세), 이선녀 씨(48세) 부부. 2000. 2.

정선군 정선읍 귤암리 윗만지 최돈연 씨(82세). 2003. 8.

영월읍 문산리 무내리 이용우 씨(79세). 1999. 5.




현재 한국환경사진가회 회장

수상경력
1985년 동아미술제 사진부문 대상 수상
1986년 아시안게임 기록사진 공모전 대상 수상

개인전
2002년 「태풍 루사가 남긴 상처」전 _ 강릉, 왕산 조각공원
2001년 「동강 백성들」 사진전 _ 서울, 혜화역 가두 전시
2000년 「동강 주민들을 위한 굿마당」 기획 _ 강원, 정선
1995년 「전통 문양」 초대전 _ 마산, 디 세네 화랑
1994년 「불교 상징」전 _ 서울, 코닥포토살롱
1990년 「전농동 588번지」 기록사진전 _ 서울, 프랑스문화원
1987년 「동아미술제」 초대전 _과천, 국립현대미술관
1987년 「87 민주항쟁」 기록사진전 _ 서울, 여백 화랑
1986년 「86 아시안게임」 기록사진전 _ 서울, 파인힐 화랑

단체전
2004년 「함께 사는 땅」 환경전 _ 서울, 광화문역 전시실
2004년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조망」 _ 강원, 영월
2003년 「우리 사는 이 땅」 환경전 _ 서울, 광화문역 전시실
2002년 「한국 현대사진의 조망」 _ 강원, 영월
2001년 「낙동강」 환경사진전 _ 서울, 혜화역 가두 전시 외 다수

저서
『우포늪』 『동강』 『낙동강』(공저)
포토에세이집 『동강 백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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